영국의 동물학자이자 초현실주의 화가 입니다

버밍엄대학에서 동물하글 전공하면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67년 동물학적 인간론 털 없는 원숭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세계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킵니다 당시만해도

인간=동물이라는 인식은 인간의 존엄성을 크게

손상시켜 교황청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규정하였고

몇몇 나라에서는 분서까지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기도 대단해 세계적으로 번역되면서

천만부이상 팔려나갔고 1996년에는 개정판도 나왔습니다

 

 

 

 

자신의 저서 털 없는 원숭이에서는

풀어낸 인간의 동물적 모습을 현대의

 대도시에 적용하면서 인간 동물원을

후속작으로 1969년에 출간 이 책 역시

큰 반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맨워칭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인간을 하나의 동물로 간주하면서

동물행동학적 입장에서 분석합니다

 

 

 

 

왜 초현실주의 화가라면 1948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화가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그의 그림을 보게되면

초현실주의적 화풍의 그림을 많이 그렸고

전시회도 자주 열었습니다

과학적이에다가 인문학적 재능 예술적

 감각까지 있어 천재라고 볼수 있습니다

 

 

브리스톰에서 출생하여서 리즈에서 성장했습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막막한 미술가 지망생이 였는데

1991년에 죽은 상어 시체를 사서 유리진열장에 넣고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이라는

제목을 달아 발표합니다

 

 

 

이 작품은 놀랍게도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고 신선한 새도운

시도라는 평가를 받고 사기꾼이라는 평가도 받을정도로

다양한 평가가 나왔습니다

이 작품은 무려 8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에 팔려나가게 됩니다

 

 

 

 

이후에는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는데 특히

신의 사랑을 위하여 라는 작품은 백금을 입힌

인간의 두개골 표면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때려 박았는데 이 작품은 5000만 파운드에

거래됩니다 한화로 보면 900억입니다

 

 

 

 

허스트의 작품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면서 상당히

파격적이면서 충격적인 묘사를 합니다

죽은 동물의 시체나 인간의 해골 심지어

사람 장기모형 파리 시체로도

작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찬가라는 장기모형 작품은

장기 모형을 그대로 사람보다 더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입니다

1960년대 이후에 세계현대미술사에

있어서 높은 평가를 받은 작가입니다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 그리고

채색화와 단색화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회화라는 매체를 재해석하면서 그 영역을 확장시켰습니다

 

 

 

 

리히터의 회화의 양식을 단일하게 규정하기 힘들정도로

다양하고 동시다발성과 분절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리히터는 1960년대 초기에는 구상사진회화

1966년 이후에는 극사실적인 풍경사진화 및 기하학적

추상회화 1971년 72년 사이에는 유명 사진인문화

1877년 이후에는 추상회화의 정물화 등을 많이 제작하였습니다

 

 

 

 

리히터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입니다

리히터는 현실이 어느 하나의 그림 안에서 단 한번에

남김없이 포착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오직 남는 것은 손으로 잡지 못한 채 현실을 접근하는

끝없는 시도뿐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나 리히터의 그림도 결코 현실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리히터는 1980년대의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어렸을때 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화가였던 숙부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러던 중 1911년 입체파 그림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작품은 크게 변합니다

 

 

 

 

현대 미술에 더 가까이 접하기 위해서 파리로 건너가서

입체파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풍경을 점차로

추상화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60대 들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몬드리안의 작품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합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이 인기가 높아지고

그의 그림을 모티브로한 몬드리안룩이 선보여지기도 했습니다

뉴욕의 역동적인 분위기 유행하던 비밥 재즈에 심취한

몬드리안은 뉴욕에서 제 2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검은 수직선 수평선에서 원색의 선들로

컨버스를 채웁니다

 

 

 

 

몬드리안의 특징을 보면 차가운 추상 수직 수평 삼원색

무채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작품을 우주의 진리 근원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였으며 후기에는 엄격했던

그의 작품 세계가 많이 활달하게 느껴지는것을 볼수 있습니다

원색을 많이 사용하여서 리듬감이 느껴집니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입니다

여성 육체를 묘사하는데 특수한 표현을 보여줬고

풍경화에서도 뛰어납니다

인상파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우면서도뛰어나게 화려한 멋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처음에 살롱에 출품했을때 리즈 상을 중심으로

그의 작풍은 분명해지고 인상파 제 1회 전시회에

유명한 관람석을 출품했는데 그 당시에는 비난을 샀습니다

그러나 1876년에 대작

몰랭 드 라 갈레트를 발표하면서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광선과 춤추는 군중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르누아르는 조심스럽게 생활했는데

지우를 얻어 사교계의 사람을 그린 샤르팡티의 부인과 그 딸들과

다른것들도 아름답습니다

세잔은 자연을 추구하긴하였지만 인간에게 그 흥미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 색깔을 선명하게 칠해서

색채 화가라고도 불렸고 특히 적색의 포현에서도

뛰어나서 근대 최대의 새채 화가로 알려져있습니다

프랑스 남쪽 끝에 있는 엑상프로방스에서

은행가 오귀스트 세잔과 엘리자베드 오베르

사이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고햐으이 기숙사 국민학교를 나온 후에

고등학교 부르봉을 다니면서

소설가 에밀 졸라와 사귀게 됩니다

졸업후 화가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됨

 

 

 

 

아버지의 극성적인 반대로 포기하였지만 대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온뒤에는 아버지의 은행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졸라의 권유로

어머니의 아버지의 설득하고

다시 미술쪽으로 나아가 22세 때 파리로 나가

그림 공부를 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기오망 피사로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기도 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1870년 경 어둡고 격정적인 상태를

에로틱하게 표현하여서 환상적인 느낌도 주었지만

카미유 피사로의 외강 묘사의 자극을 받아

화면이 급속히 밝고 단순화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살롱에 출품한 작품들이 낙선하자

인상파를 떠나 모네의 견실성을 뼈대로한

형과 색깔의 과묵한 표현에 집중하여서

긴밀한 구성을 갖는 그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해 나가게 됩니다

 

 

 

 

그는 자연의 표면보다는 내부에 있따면서 말하면서

정확한 묘사를 하기 위해서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후기인상주의 화가입니다

주식 중개인으로 넉넉하게 살고

여유 있는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들이

주말에 그림을 그리는

주말화가로 그림을 어느정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35세에 갑자기 화가가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프랑스 서부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파리로가

미술계의 최신 트랜드를 파악하였습니다

 

 

 

 

고갱의 목적은 인상파들이 초기에 줬던 충격처럼

인간들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어내면

나는 미술계의 넘버원이 되겠지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쇼킹한 작품은 내지 못하였는데

조르주 쇠라가 점묘법으로 미술계에 쇼크를 일으켜

이목이 쏠리자 쇠라의 점묘법을 저주받은 점들이라고

말할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은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어서 평평한 느낌을

주는 색면과 색깔과는 다른 강력한 색채가

고갱 그림의 특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긜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그림속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문명을 혐오하면서 원시와 자연을 예찬했다는

특징도 살아있습니다

 

 

천재란 단어가 그를 위한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을정도로 그림에 있어서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말보다 그림을 먼저 시작했다고 하고

처음 입 밖으로 내밷은 단어가 연필이라고 합니다

20세가 되기 전에는 그의 회화실력은 고전주의를 마스터한

수준이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훗날 그려진 입체파 그림들에게는

대중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들어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대했던 그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목만 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피카소는 그림을 어떻게 하면 평면에서 입체의 여러 면

특성을 한번에 나타낼 것이라는 개념을 표현할 것을

이해하면서 바라보았습니다

 

 

 

 

초창기에는 친구이자 신인 막스 자콥과 함께

청색 시대를 그리면서 가난하고 아픈 시절을 보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엄청나게 특이한걸로 유명합니다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것은 상황과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피카소는 과거의 영광을 잘 재헌하는 유물이 되느냐

아니면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서

미술계의 혁명가가 되느냐의 길에서

후자를 선택하여서 대 성공 했습니다

 

 

 

 

생전부터 그림이 잘 팔렸던 화가였는데

파카소 본인도 자신의 그림이 얼마나

팔리는지 확인했다고 합니다

돈의 액수보다는 자신의 그림의 가치를

궁금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그가 1872년에 그린 인상 해돋이라는

그림을 본 평단에서 정말로 인상만 그렸을 뿐이라고

조롱을 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하는 유파에다가 인상파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이게 정식 이름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다른 인상파 화가들조차 빛의 변화를 포착하는 데만

집중해서 자체의 형태를 파악하기도 어렵고

무게감이 떨어지는 인상주의 한계를 자각해

화풍을 바꿀 떄까지도 그만은 끝까지

인상주의 화풍만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인상주의를 시작하면서 끝까지 지킨

인상파의 아버지라고도 할수 있는 인물입니다

인상파라고 말할 때 작품의 대부분이 바로 그의 작품입니다

인정 받지 못할때는 가난에 시달렸지만 세월이 흐르고

인상파의 작품이 인정받기 하면서

그 역시도 정원이 딸린 저택을 살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인 수련 연작은 날씨 계절

시간에 따라서 변화하는 수련의 빛과 색채를

27년에 걸쳐서 무려 300여점의 작품으로 그린거라고 합니다

 

 

근대의 가장 훌륭한 풍경화가의 한사람인데

감정은 섬세하면서 초기의 농원의 연작도 아름다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피사로는 쿠바에 가까운 토마섬에서 태어났는데

12세 때 파리로 나가서 회화에 뜻을 두고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풍경화에 매력을 느낀뒤에 야외에 나가서

 햇볕 아래에서 풍경 그리기에

열중합니다

루브센에 주거를 두고 보볼전쟁이 시작되자

런던으로 가서 모네를 만납니다

두사람은 런넌에서 터너를 만나 빛의 표현에 대한 지도를 받고

인상파의 표현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1874년에 친구들과 인상파 전람회를 결성하여 인상파전의

중심인물이 되어서 생애에 인상파적인

 그림 제작에 일관하였습니다

만년에는 루앵 항구나 파리의

오페라가등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피사로의 작품에는 온기가 통하는 듯한 따스한 감정이 많습니다

섬세한 터치로 색채를 쌓아 색채는 아로새기듯 빛나는데

피사로는 단지 색채를 물체의 빛깔 이상으로보는 자기의 감정의

언어로 섬세하게 감정을 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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